전쟁과 역사

비운의 혁신가, 죽산 조봉암: 이승만 정권은 왜 그를 죽여야만 했나

solvianq 2025. 6. 14. 12:00
728x90

초대 농림부장관, 비운의 혁신가, 죽산 조봉암(지브리 AI)

서론: 1959년의 죽음, 2011년의 부활

1959년 7월 31일 오전, 서대문형무소의 한 독방 앞에서 간수가 차가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조봉암, 나오시오!" 죽산(竹山) 조봉암은 평소처럼 정좌한 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동요하지 않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올 것이 왔군.". 사형 집행장으로 향하는 그의 걸음은 담담했다. 사형 집행관이 마지막 유언을 묻자, 그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자신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역사에 새겼다.

"이승만 박사는 소수가 잘살기 위한 정치를 했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살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소.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는 없을 것이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가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오."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이승만 정권의 탄압은 그의 시신에까지 미쳤다. 경찰은 장례식장에 들이닥쳐 공개 장례를 금지하고, 조문객의 출입을 막았으며, 심지어 묘비조차 세우지 못하게 했다. 이는 일제가 순국한 독립투사에게 가했던 탄압 방식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그리고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흐른 2011년 1월 20일, 대한민국 대법원 대법정.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은 52년 전 사법부가 내렸던 판결을 스스로 뒤집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조봉암에게 씌워졌던 국가변란 및 간첩 혐의에 대해 전원일치로 무죄를 선고했다. 이 판결은 그의 죽음이 정적 제거를 위한 '사법살인(司法殺人)'이었음을 국가 최고 사법기관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역사적 자기고백이었다.

 

어떻게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이자 초대 농림부장관, 국회부의장을 지낸 거물 정치인이 국가의 이름으로 살해당해야만 했을까? 이 보고서는 식민지 시대의 독립투사에서 대한민국을 설계한 혁신가로, 그리고 마침내 권력의 가장 위험한 정적이 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던 죽산 조봉암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업적을 추적하며 그 비극의 진실을 파헤치고자 한다.


1부: 혁명가의 길 - 식민 통치의 도가니에서 단련된 애국자

죽산 조봉암의 정치 사상은 그의 출신 배경과 시대적 경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1899년 경기도 강화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농민의 고단한 삶을 몸소 체감하며 자랐다. 이 경험은 훗날 그가 모든 국민이 고루 잘사는 사회를 필생의 과업으로 삼게 된 원초적 동력이 되었다. 강화군청의 임시 직원(고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원칙을 고수하는 강직한 성품 탓에 상관과의 마찰이 잦았다.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결정적 계기는 1919년 3·1 운동이었다. 강화도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른 경험은, 평범한 청년을 불굴의 독립투사로 거듭나게 했다. 그는 훗날 "나를 붙잡아서 감옥으로 보내준 일본놈은 나로 하여금 일생을 통해서 일본제국주의자와 싸운 애국투사가 되게 한 공로자였다"고 회고할 만큼, 이 사건을 자신의 정치적 원점으로 삼았다.

 

출옥 후 그는 더 넓은 세상에서 독립운동의 길을 모색했다. 서울 YMCA 중학부에서 신문물을 접하며 여운형, 이승만 등 민족 지도자들과 교류했고, 일본으로 유학 가 주오대학에 재학하며 박열 등이 조직한 공산주의 단체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처음 접했다. 당시 제국주의의 모순과 민족적 수탈의 구조를 목도한 많은 지식인에게 사회주의는 가장 과학적이고 강력한 항일 투쟁의 이념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의 사회주의 선택은 이념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아니라, 조국 해방이라는 절대 절명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찾으려는 실용적이고 전략적인 판단이었다.

 

그의 신념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소련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하며 이론적 기반을 다졌고,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해 핵심 간부로 활동했다. 특히 만주로 건너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하고 책임비서로 활약하는 등, 그의 청년기는 오롯이 항일 독립 투쟁에 바쳐졌다.


2부: 위대한 전환 - 새롭고 더 공평한 공화국의 설계자

1945년 8월 15일, 조국은 해방을 맞았지만 곧이어 이념 대립이라는 새로운 혼란에 휩싸였다. 이 시기 조봉암은 자신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단을 내린다. 그는 1946년 6월, "노동계급의 독재나 자본계급의 전제를 반대한다"고 선언하며 조선공산당과의 결별을 공식화했다. 그는 소련의 지령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박헌영 노선의 독단성과 교조주의를 비판하며, 좌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통일된 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이는 그가 훗날 추구하게 될 '제3의 길'의 첫 번째 선언이었다.

 

이러한 전향은 그가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길을 열었다. 그는 제헌 국회의원으로 헌법기초위원회에서 활동했으며, 마침내 이승만 정부의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공산주의 활동 경력이 있는 그를 내각의 핵심인 농림부장관에 임명한 것은, 당시 시대의 가장 시급한 과제였던 '농지개혁'을 완수할 최적임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필생의 역작: 1949년 농지개혁

당시 대한민국은 인구의 절대다수가 농민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지주의 땅을 빌려 경작하는 소작농이었다. 이러한 봉건적 토지 소유 구조는 농촌의 만성적인 빈곤과 사회 불안의 근원이었다. 특히 북한이 1946년 '무상몰수·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을 단행해 농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기에, 남한 체제의 안정과 정당성 확보를 위해서라도 농지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였다.

 

조봉암이 설계하고 추진한 농지개혁은 '유상매수·유상분배' 원칙에 기반했다. 정부가 3정보(약 9,000평) 이상의 농지를 소유한 지주로부터 땅을 유상으로 매입하여, 땅이 없는 농민에게 유상으로 분배하는 방식이었다. 이 개혁은 단순한 토지 재분배를 넘어, 대한민국 사회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다층적인 효과를 낳았다.

 

첫째,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어벽이 되었다. 소작농에서 자영농이 된 농민들은 자신의 땅을 지키려는 강한 의지를 갖게 되었고, 이는 토지 무상 몰수를 주장하는 공산주의 이념이 남한 사회에 발붙이기 어렵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훗날 6·25 전쟁 발발에도 불구하고 남한 체제가 붕괴하지 않은 데에는 농지개혁의 성공이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둘째, 산업화의 초석을 다졌다. 조봉암은 지주에게 토지 보상으로 현금이 아닌 '지가증권(地價證券)'이라는 정부 채권을 발행했다. 이 증권은 일본인이 남기고 간 공장이나 기업 등 귀속재산(적산)을 인수할 때는 액면가 전액을 인정해 주었지만, 다시 농지를 사는 데 사용하면 가치가 크게 떨어지도록 설계되었다. 이 절묘한 장치는 지주 계급이 자신들의 자본을 농지가 아닌 산업 분야에 투자하도록 유도하는 효과를 낳았다. 이를 통해 지주 자본은 산업 자본으로 전환되었고, 대한민국 산업화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처럼 혁명적인 개혁은 지주 계급을 대변하던 한민당(한국민주당)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그들은 조봉암이 장관 관사 수리비를 유용했다는 등의 의혹을 제기하며 그를 정치적으로 공격했다. 국회 표결에서 혐의가 부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한민당의 압력에 밀려 1949년 2월 조봉암의 사임을 받아들였다. 비록 장관직에서는 물러났지만, 그가 뿌린 농지개혁의 씨앗은 대한민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거대한 결실을 보았다. 이는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대통령이 전직 공산주의자를 기용하여 사회주의적 색채가 짙은 정책을 성공시킴으로써, 역설적으로 체제를 안정시킨 한국 현대사의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로 기록된다.


3부: 도전자, 왕좌를 위협하다

농림부장관 사임 이후에도 조봉암의 정치적 여정은 멈추지 않았다. 국회부의장을 역임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진 그는, 195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데 이어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다시 도전장을 내밀었다.

1956년 대통령 선거: 정치 지형을 뒤흔든 216만 표

1956년 대선은 이승만 정권의 장기 독재에 대한 국민적 피로감이 누적된 상태에서 치러졌다. 이승만은 자신의 종신 집권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이라는 희대의 정치 코미디까지 연출하며 3선 출마를 강행했다. 선거 국면에서 강력한 야당 후보였던 민주당의 신익희가 유세 도중 급서하는 비극이 발생하면서, 선거는 이승만의 무난한 승리로 끝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무소속으로 출마한 조봉암이 일으킨 돌풍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는 경찰과 공무원을 총동원한 관권선거와 부정선거가 만연한 상황에서도 무려 216만 3,808표, 득표율 23.8%를 기록하며 이승만을 위협하는 강력한 경쟁자로 급부상했다. 이승만은 압도적 승리를 예상했지만, 결과는 과반을 겨우 넘는 55.65% 득표에 그쳤다. 특히 함께 치러진 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의 후계자였던 자유당의 이기붕이 민주당의 장면에게 패배한 것은, 이승만 정권의 레임덕과 정권 교체 가능성을 알리는 명백한 신호였다. 216만 표라는 숫자는 단순한 득표수를 넘어, 이승만의 독재와 '북진통일' 구호에 염증을 느낀 민심이 새로운 대안을 갈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정치적 지진과도 같았다.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정권의 존립을 위협하는 실체적 위협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평화'라는 죄: 진보당과 평화통일론

대선에서의 선전을 바탕으로 조봉암은 1956년 11월,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진보당(進步黨)을 창당했다. 진보당의 강령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공산독재와 부패한 자본가 독재를 모두 배격하는 진정한 민주주의, 노동자·농민의 생활권을 보장하는 계획경제, 그리고 이승만 정권의 심기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평화적 방식에 의한 조국통일'을 핵심 정책으로 내걸었다.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은 이승만 정권의 공식 통일 방안인 '북진통일(北進統一)'론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 현실론 대 구호: 조봉암은 북진통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는 "총알 한 발, 휘발유 한 방울까지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데, 미국이 반대하는 북진통일을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냐"고 반문하며, 북진통일이 국민을 기만하는 공허한 구호에 불과함을 폭로했다.
  • 평화 대 전쟁: 무엇보다 그는 6·25 전쟁의 참화를 겪은 국민들의 평화에 대한 열망에 호소했다. 다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있어서는 안 되며, 평화적인 방식으로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국민들에게 큰 공감대를 형성했다.
  • 자주적 대안: 그는 북한의 통일 방안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승리한 남한이 주도권을 갖고 유엔 감시 하의 남북 총선거 등 구체적인 방안을 통해 평화적으로 통일을 달성해야 한다는 자주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이승만 정권에게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은 단순한 정책적 이견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권의 존재 기반 자체를 뒤흔드는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권위주의 통치는 북한의 위협을 극대화하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통해 사회적 긴장을 유지함으로써 정당화되었다. '북진통일' 구호는 이러한 체제를 유지하고, 모든 반대 목소리를 '용공'으로 낙인찍으며, 이승만을 절대적인 지도자로 신격화하는 핵심 장치였다.

 

그런데 조봉암은 평화가 가능하며, 그것이 더 바람직하고 현실적인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논리가 국민적 설득력을 얻는다는 것은, 곧 이승만 정권이 유지해온 비상 전시체제의 명분이 사라짐을 의미했다. 평화가 가능하다면, 독재와 인권 탄압, 민생 파탄을 안보 논리로 정당화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이승만 정권에게 '평화'는 체제 전복을 꾀하는 불온하고 위험한 단어였으며,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은 반드시 제거해야 할 정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4부: 사법살인의 해부 - 진보당 사건

1956년 대선 이후, 조봉암과 그가 이끄는 진보당을 제거하려는 이승만 정권의 계획은 치밀하고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1958년 5월 총선을 앞두고 진보당의 지지세가 확산되자, 정권은 마침내 칼을 빼 들었다. 주한 미 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전문에서도 "진보당 간부들의 체포는 1958년 총선에서 진보당의 선거운동을 방해하려는 시도"라고 분석했을 만큼, 그 정치적 의도는 명백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조봉암은 벌써 조치되었어야 할 인물"이라고 말하며 노골적으로 수사에 개입했고 , 1심 판결이 마음에 들지 않자 "이러한 판사들은 처리하는 방법이 없는지 모르겠다"며 사법부를 공공연히 협박했다. 육군 특무부대(CIC, 기무사의 전신)까지 동원된 수사망은 처음부터 조봉암을 '간첩'으로 만들어 사형시키겠다는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

조작된 혐의와 뒤집힌 재판

검찰이 내세운 혐의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여 국가를 변란하려 한 행위라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둘째, 북한의 지령을 받은 간첩 양이섭(梁利涉)을 통해 공작금을 받고 간첩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그러나 재판 과정은 권력의 시나리오대로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1958년 7월, 유병진 부장판사가 이끈 1심 재판부는 정권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법과 양심에 따른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진보당의 강령이 헌법에 위배되지 않으며, 조봉암이 간첩이라는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판단하여 핵심 혐의였던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국가변란 목적)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다만 일부 혐의만을 유죄로 인정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이 판결은 이승만 정권을 격노케 했다. 판결 사흘 뒤, '반공청년단'을 자처하는 관제 폭력배 수백 명이 법원에 난입해 "용공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 "간첩 조봉암을 처단하라"고 외치며 난동을 부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유병진 판사는 결국 법복을 벗어야 했고, 이는 다른 판사들에게 보내는 명백한 경고장이었다.

 

이후 항소심과 대법원 재판은 사법 정의가 어떻게 유린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항소심 과정에서 핵심 증인인 양이섭은 "특무대의 불법 감금과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했다"고 진술을 번복했다. 실제로 양이섭은 민간인임에도 불구하고 영장 없이 군 특무대에 의해 한 달 넘게 불법 감금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으며, 이는 명백한 직권남용이자 불법행위였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이 모든 절차적 위법성과 증거의 신빙성 문제를 무시한 채, 오직 정권의 뜻에 따라 1심 판결을 뒤집고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959년 2월, 대법원은 이러한 부당한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 조봉암 측이 재심을 청구했지만, 대법원은 불과 하루 만에 이를 기각했고, 기각 결정이 내려진 지 17시간 만인 다음 날 오전에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는 사법 절차의 근간을 무시한, 명백한 '사법살인'의 완성이었다.

표 1: 정의의 역전 - 조봉암 사건 재판 결과 비교

재판 단계
핵심 혐의: 간첩죄
핵심 혐의: 국가보안법 위반 (진보당 강령)
조봉암에 대한 형량
재판 과정 및 사법부 독립성
1심 법원 (유병진 판사)
무죄
무죄
징역 5년 (기타 혐의)
증거 부족에 근거한 판결. 정치적 압력에도 사법부 독립성 수호
정치적 개입
해당 없음
해당 없음
해당 없음
관제 폭력배 법원 난입. 유병진 판사 강제 퇴진 및 이승만 대통령의 공개적 판결 비난
고등법원 (항소심)
유죄
유죄
사형
판결 뒤집힘. 핵심 증인 양이섭의 강압 자백 번복 진술 묵살
대법원
유죄
유죄
사형 (확정)
정치적으로 오염된 판결 확정. 재심 청구 기각 후 초고속 사형 집행

결론: 처형할 수 없었던 유산

죽산 조봉암의 삶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서사였다. 그는 식민지 조선의 해방을 위해 싸운 독립투사였고, 공산주의의 한계를 깨닫고 전향하여 대한민국의 건국에 헌신한 현실주의자였으며, 모든 국민이 고루 잘사는 나라를 꿈꾼 혁신가였다. 이승만 정권은 그를 '빨갱이', '간첩'으로 낙인찍어 처형했지만, 그의 진짜 죄는 권위주의 독재에 맞서 평화와 민주주의라는 대안을 제시하고, 국민의 마음을 얻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죽음은 한 정치인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진보와 혁신의 싹을 잘라버린 사건이었다. 그의 사후, 한국의 정치 지형은 오랫동안 독재에 협력하는 보수와 독재에 저항하는 보수라는 이분법적 구도에 갇혔고, 그가 추구했던 사회민주주의적 '제3의 길'은 수십 년간 금기시되었다.

 

그러나 진실은 결코 묻히지 않았다. 52년 만에 내려진 대법원의 무죄 판결은 단순히 한 개인과 유족의 명예를 회복시킨 것을 넘어, 국가 폭력에 의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중대한 이정표였다. 조봉암은 마침내 애국자이자 사법살인의 희생자라는 자신의 올바른 역사적 위상을 되찾았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양극화, 경제적 불평등, 한반도의 긴장 상황 속에서 그가 남긴 유산은 더욱 빛을 발한다. 성장을 추구하되 분배의 정의를 잊지 않는 균형 잡힌 경제, 이념 대결을 넘어 실용적이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등 그가 제시했던 비전은 21세기 대한민국에도 여전히 유효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죽산 조봉암의 삶은 정치적 불관용이 얼마나 큰 비극을 낳을 수 있는지, 그리고 더 정의롭고 민주적인 사회를 향한 투쟁이 얼마나 숭고한 가치를 지니는지를 우리에게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역사의 거울이다.


참고자료 (References)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콘텐츠 (contents.history.go.kr)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archives.kdemo.or.kr)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보고서
  • 국가기록원 (archives.go.kr)
  •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 역사비평사, 1999.
  • 정태영 외 공편, 『죽산 조봉암 전집』, 세명서관, 1999.
  • 관련 언론 보도 (연합뉴스, 한겨레, 프레시안, 통일뉴스 등)

태그 (Tags)

#조봉암 #죽산조봉암 #진보당 #진보당사건 #이승만 #사법살인 #농지개혁 #평화통일 #한국현대사 #제1공화국 #정치탄압 #재심 #무죄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