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역사

왜 이란은 핵에 집착했을까? ― 1953 쿠데타부터 JCPOA 붕괴까지, 70년 역사로 읽는 ‘페르시아 핵 집념’ 로드맵

빛조각 2025. 6. 19. 22:00
728x90

왜 이란은 핵에 집착했을까 (지브리 스타일 AI)

 

I. 서론: 페르시아의 역설 – 원자를 향한 70년의 집념

이란의 핵 프로그램은 단순히 하나의 무기를 향한 추구가 아니다. 그것은 야망과 공포, 자부심과 저항이 뒤얽힌 채 이란의 현대적 정체성 속에 깊이 짜여 들어간 한 국가의 대서사시와 같다. 이란의 핵에 대한 ‘집념(執念)’은 그들의 독특한 역사적, 지정학적 환경에 대한 지극히 합리적이지만 동시에 위험천만한 대응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란의 핵을 둘러싼 70년의 역사는 외부의 시선으로는 종종 비이성적인 집착으로 비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생존과 자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담겨 있다.

 

본 글에서는 이란 핵 동기의 네 가지 결정적 전환점을 따라 이 기나긴 여정을 추적하고자 한다. 첫째, 팔라비 왕조 시절 지역 패권과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왕의 꿈’. 둘째, 이슬람 혁명과 이어진 전쟁의 트라우마가 핵 프로그램을 국가 생존의 문제로 바꿔놓은 ‘안보적 강박’. 셋째, 국제사회와의 외교적 타협을 통해 대안적 경로를 모색했던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 넷째, 외교의 붕괴가 이란을 그 어느 때보다 핵 문턱 가까이로 밀어붙인 ‘파국의 시대’. 이 네 단계의 변곡점을 따라가다 보면, 이란이 왜 그토록 끈질기게 핵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II. 샤의 야망 – 친서방 국가의 핵 보유 꿈 (1950년대–1979년)

미국의 후원으로 시작된 핵 개발

이란 핵 프로그램의 역사는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가장 강력한 반대자인 미국의 후원 아래 시작되었다. 1950년대, 친미 성향의 군주였던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은 이란의 미래 에너지 공급 문제 해결과 국가 발전을 명분으로 원자력 연구에 관심을 보였다. 이 구상은 1957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행정부의 ‘평화를 위한 원자력(Atoms for Peace)’ 프로그램에 이란이 참여하고, 양국 간 원자력 협정이 체결되면서 구체화되었다.  

 

이 협정은 이란 핵 개발의 초석이 되었다. 미국은 1967년 수도 테헤란에 5MWt급 연구용 원자로를 제공했고, 이는 이란 최초의 원자로이자 중동 지역 원자력 연구의 선구적 사례가 되었다.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이란은 중동에서 가장 앞선 원자력 연구개발 국가로 발돋움했으며, 이는 이란의 자부심을 고취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왕의 꿈: 위신, 패권, 그리고 에너지

팔라비 왕조 시절 핵 프로그램의 동기는 훗날 이슬람 공화국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샤에게 핵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야망의 도구였다.

 

첫째, 근대화와 국가적 위신의 상징이었다. 샤가 추진한 ‘백색혁명’은 이란을 서구식으로 근대화하려는 거대한 프로젝트였고, 원자력 프로그램은 그 정점에 있는 기술적 성취이자 국가적 위대함을 과시하는 수단이었다.  

 

둘째, 지역 패권 장악을 위한 전략적 자산이었다. 샤는 스스로를 ‘페르시아만의 경찰’로 여겼으며, 강력한 이란을 건설하고자 했다. 핵 프로그램은 특히 경쟁 관계에 있던 이라크의 바트당 정권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고, 중동의 지역 강국으로서 이란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을 띠고 있었다.  

 

셋째, 장기적인 에너지 안보를 위한 포석이었다. 석유 자원이 언젠가는 고갈될 것이라 내다본 샤는 1990년대 중반까지 최대 23기의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한다는 원대한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 논리는 오늘날 이란이 핵 개발의 평화적 목적을 주장할 때 여전히 사용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 계획의 일환으로 이란은 서독 기업과 부셰르 지역에 원자로 2기를 건설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불신의 씨앗

이란과 미국의 밀월 관계 속에서도 불신의 씨앗은 조용히 싹트고 있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 미국 조야에서는 이란이 평화적 핵 기술을 군사적 목적으로 전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는 훗날 혁명 이후 양국 간 핵 갈등의 원초적 배경이 된다. 물론 당시 이란은 1968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서명하고 1970년 의회에서 비준하며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겠다는 법적 약속을 한 상태였다.  

 

이 시기의 역사는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첫째는 ‘미국 후원의 역설’이다. 이란 핵 프로그램의 최대 적대국이 된 미국이 사실은 그 프로그램의 원조 제공자였다는 사실은 이란이 느끼는 깊은 배신감의 근원이며, 서방의 반대가 비확산이라는 원칙이 아닌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된 위선이라는 이란 측 주장의 핵심 근거가 된다. 이란은 서방이 스스로 부여했던 권리를 이제 와서 부인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는 핵 프로그램에 대한 국내 민족주의적 지지를 결집시키는 동력이 된다.

 

둘째는 ‘동기의 전환’이다. 샤의 핵 프로그램이 야망과 위신에 기반했다면, 이슬람 공화국의 프로그램은 공포와 생존에 그 뿌리를 두게 된다. 이 근본적인 동기의 변화야말로 70년 이란 핵 역사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다. 샤 시대의 이란은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 속에서 에너지, 지역 패권, 근대화라는 미래지향적 목표를 추구했다. 그러나 1979년 이슬람 혁명은 이 모든 안보 구도를 파괴하고 이란을 고립시켰으며, 뒤이은 이란-이라크 전쟁은 실존적 위협을 가했다. 이로 인해 핵 프로그램의 목적은 지역 강국의 사치품에서 고립된 국가의 생존 필수품으로 완전히 재정의되었다.  


III. 혁명과 전쟁 – 안보 강박의 탄생 (1979년–1988년)

혁명과 함께 멈춰선 핵 시계

1979년 이슬람 혁명은 이란 핵 프로그램의 급진적인 단절을 의미했다.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초기에 핵 프로그램을 낭비가 심하고, 비이슬람적이며, 타락한 팔라비 왕조의 서구 중심적 프로젝트로 간주했다. 혁명 이후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 인질 사건으로 미국과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고, 서방의 모든 원자력 협력은 중단되었다. 많은 이란의 핵 과학자들은 국가를 떠났고, 핵 프로그램의 시계는 사실상 멈춰 섰다.  

이란-이라크 전쟁: 궁극적 촉매제

이란의 핵 집념을 불타오르게 만든 용광로는 바로 1980년부터 1988년까지 8년간 이어진 이란-이라크 전쟁이었다. 당시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는 이란을 침공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핵무기 개발을 추구하고 있었다(이는 1981년 이스라엘의 오시라크 원자로 폭격으로 이어졌다).  

 

전쟁 중 이란에 가장 큰 트라우마를 남긴 것은 이라크가 이란의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대규모로 화학무기를 사용한 사건이었다. 국제사회는 이 명백한 전쟁범죄에 대해 침묵하거나 사실상 방관했다. 이러한 국제적 고립과 무력감은 이란 지도부와 국민들의 뇌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비밀스러운 부활

전쟁의 참혹한 경험은 핵 프로그램의 비밀스러운 부활로 직접 이어졌다. 실존적 위협과 국제적 고립에 직면한 호메이니는 기존의 입장을 180도 바꿔 1980년대 중반, 핵 프로그램의 비밀 재개를 지시했다. 이제 핵 프로그램의 동기는 더 이상 국가적 위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시는 외부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지 않도록 보장해 줄 ‘궁극의 억제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핵은 이제 국가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이 시기의 경험은 이란의 핵 전략에 두 가지 깊은 흔적을 남겼다.

 

첫째, 화학무기 공격의 트라우마는 이슬람 공화국 핵 프로그램의 심리적 기반이 되었다. 이 경험은 오늘날까지도 핵 개발의 도덕적, 전략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근거로 작용한다. 호메이니가 초기에 프로그램을 중단시켰다가 , 이라크의 화학무기 공격에 국제사회가 침묵하는 것을 목격한 후 , 이를 재개하기로 결정한 과정은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즉, 재래식 군사력만으로는 억제력이 불충분하며, 국제 규범이나 조약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대칭적이고 궁극적인 억제력, 즉 핵무기 또는 핵무기 제조 능력만이 체제와 국가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란이 그토록 비밀리에, 그리고 결연하게 핵 프로그램을 다시 추진한 이유다.  

 

둘째, 핵 프로그램이 이슬람 혁명수비대(IRGC)의 관리하에 재개되면서, 이는 이란 안보 국가의 핵심부에 깊숙이 자리 잡게 되었다. 팔라비 왕조 시절 이란원자력기구(AEOI)와 같은 민간 기구가 주도했던 것과는 달리 , 전쟁 이후 프로그램은 명확한 군사안보적 목적을 띠고 재편되었다. 혁명의 이념적, 군사적 수호자인 IRGC가 핵심 주체로 부상하면서 핵 프로그램은 특정 정치 분파의 향방과 무관하게, 협상 불가능한 국가적 과제로 제도화되었다. 이는 훗날 하타미나 로하니 같은 온건파 대통령이 집권하여 외교적 해법을 모색할 때조차, 핵 프로그램의 핵심은 이를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안보 자산으로 여기는 강경파의 통제하에 남아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IV. 그림자 프로그램 – 고립, 제재, 그리고 비밀의 추구 (1989년–2002년)

자립적인 핵연료주기 구축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난 후, 서방의 기술 접근이 완전히 차단된 이란은 새로운 파트너와 비밀 조달 네트워크를 통해 핵 능력 자립에 나섰다. 이란은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부셰르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재개하고, 중국 및 파키스탄 등으로부터 다른 기술 지원을 모색했다.  

 

이 시기 이란의 최우선 목표는 우라늄 농축을 포함한 완전한 핵연료주기를 독자적으로 완성하는 것이었다. 이는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핵 주권을 확보하는 유일한 길로 여겨졌다.

2002년의 폭로: 세계가 나탄즈와 아라크를 발견하다

이란의 비밀스러운 노력이 국제 사회에 알려지며 전 세계적인 위기로 비화된 것은 2002년 8월이었다. 이란의 반정부 단체인 이란국민저항위원회(NCRI)는 기자회견을 통해 이란이 두 개의 거대한 미신고 핵시설을 비밀리에 운영하고 있음을 폭로했다. 하나는 나탄즈에 위치한 대규모 지하 우라늄 농축 시설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라크에 건설 중인 중수 생산 시설이었다.  

 

특히 아라크의 중수로는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중수로가 무기급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데 이상적인 경로를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이는 이란이 농축 우라늄 외에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두 번째 길을 동시에 개척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20년간의 기만, 드러나다

이 폭로는 국제 사회의 즉각적이고 강도 높은 조사를 촉발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이 해당 시설들을 방문하여 그 존재를 확인했고 , 이후의 조사를 통해 거의 20년에 걸쳐 이란이 핵 활동을 신고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이는 이란이 서명한 NPT 안전조치 협정의 명백한 위반이었다. 이로 인해 이란의 핵 프로그램이 순수하게 평화적이라는 주장은 신뢰를 잃었고, 2006년부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란에 대한 일련의 제재 결의안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전략은 ‘의도적인 이중용도 전략’으로 분석될 수 있다. 이란은 본질적으로 군사적 전용이 가능한 ‘평화적’ 프로그램을 구축함으로써, 언제든 핵무기 개발로 전환할 수 있는 선택지를 확보하고자 했다. 핵연료주기 완성을 추구한 것은 단순히 에너지 자립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고, 잠재적 핵 능력을 보유하기 위함이었다. 이란은 평화적 프로그램이라는 명분 아래 우라늄 농축과 중수 생산 기술을 확보함으로써 , 정치적 결단만 내려지면 단기간 내에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사실상의 핵보유국(virtual nuclear power)’이 되려 했다. 이 전략은 실제 핵무기 보유에 따르는 외교적, 안보적 비용을 치르지 않으면서도 억제력을 확보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또한, 2002년 NCRI의 폭로는 지정학적 전환점이었다. 이 폭로가 이란 핵 위기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만, 이를 국제화시켰다는 점에서 결정적이었다. 2002년 이전까지 이란의 핵 의도에 대한 우려는 정보기관 사이에서 비밀리에 다뤄졌으나 , NCRI의 공개 폭로 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하며 IAEA와 유엔이 행동에 나서도록 강제했다. 특히 이 폭로가 9.11 테러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 직후에 나왔다는 점은 , 이후 10년을 규정하게 될 가혹한 제재 체제를 위한 정치적 동력을 제공했다. 이는 사실상 이란의 ‘그림자 프로그램’ 시대를 끝내고, 공개적인 대결의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V. 외교적 승부수 – JCPOA와 짧았던 해빙기 (2003년–2018년)

JCPOA에 이르는 길

2002년 비밀 핵시설 폭로 이후, 이란과 국제사회는 제재와 핵 프로그램 확장이라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초기에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 EU3가 주도하여 이란과 일시적인 핵 활동 동결 합의를 이끌어냈으나, 이는 번번이 깨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란의 원유 수출과 금융 시스템을 겨냥한 국제 제재는 점점 더 강력해졌고, 이는 이란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며 막대한 내부 압력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교착 상태에 돌파구가 마련된 것은 2013년, 이란의 고립 종식과 경제난 해결을 공약으로 내건 온건파 하산 로하니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부터였다. 여기에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가 군사적 충돌을 피하고 외교적 해법을 찾기 위해 이란과의 직접 대화에 나설 의지를 보이면서, 포괄적인 핵 합의를 위한 정치적 공간이 열렸다.  

합의의 해부: 포괄적 공동행동계획 (JCPOA)

수년간의 험난한 협상 끝에 2015년 7월, 이란과 P5+1(유엔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 + 독일)은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이라는 역사적인 합의에 도달했다.  

  • 이란의 양보: 핵 프로그램을 대폭 후퇴시키는 것이 골자였다. 여기에는 원심분리기 수 대폭 감축, 농축 우라늄 재고 대부분의 해외 반출, 우라늄 농축도를 3.67% 이하로 제한, 아라크 중수로의 무기급 플루토늄 생산 불가 설계 변경, 그리고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intrusive한 IAEA의 사찰 체제(추가의정서) 수용 등이 포함되었다.  
  • 국제사회의 양보: 핵 관련 모든 국제 제재를 해제하고, 동결되었던 수십억 달러의 이란 자산을 반환하며, 이란이 세계 경제, 특히 원유 시장에 다시 복귀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었다.  

이 합의의 핵심 논리는 이란이 핵폭탄 1개를 만들 수 있는 충분한 핵물질을 생산하는 데 걸리는 시간, 즉 ‘브레이크아웃 타임(breakout time)’을 기존의 수개월에서 최소 1년 이상으로 늘리는 것이었다. 이는 이란의 기만 행위를 탐지하고 대응할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불안정한 성공

JCPOA는 외교의 기념비적인 승리였지만, 체결 직후부터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미국 내에서는 도널드 트럼프를 비롯한 비판가들이 JCPOA의 제재 해제가 이란의 미사일 프로그램이나 중동 지역 내 불안정한 행위를 다루지 않았고, 핵 프로그램에 대한 제한이 영구적이지 않다는 점(일몰 조항)을 들어 ‘최악의 협상’이라고 맹비난했다. 중동 지역에서는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이 합의가 자신들의 숙적인 이란의 핵 능력을 완전히 해체하지 않은 채 경제적 숨통만 틔워주어, 오히려 지역 내 공격성을 부추길 것이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JCPOA는 핵 비확산 전략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차를 드러냈다. 한편에서는 검증 가능하고 장기적인 제한을 확보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현실주의적 시각이 존재했다. 이들은 JCPOA가 전쟁 없이 이란의 모든 핵무기 개발 경로를 차단했으며, 되돌릴 수 있는 양보(제재 해제)를 통해 검증 가능한 안보 이익(1년의 브레이크아웃 타임)을 얻은 실용적인 외교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핵 프로그램의 완전한 해체만이 유일한 해법이라는 강경론이 있었다. 이들은 JCPOA가 이란의 농축 활동 자체를 일부 용인하고 일몰 조항을 포함함으로써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합법화하고, 핵무기 보유를 막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연시켰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처럼 타협안이 양측의 극단적인 목표를 모두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JCPOA는 정치적으로 매우 취약한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JCPOA의 제한적인 성공이 결국 합의를 무너뜨리는 요인이 되었다. JCPOA 체결로 인한 제재 해제는 이란 경제에 숨통을 틔워주었고 , 이는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이나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같은 역내 대리 세력에 대한 지원을 늘릴 수 있는 여력으로 이어졌다. 이는 이란의 지역 내 영향력 확대를 최악의 시나리오로 여겼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우려를 현실화시켰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JCPOA가 통제하고 있던 당장의 핵 위협보다는, 합의가 제공한 경제적 이익으로 인해 강화될 이란의 재래식 및 비대칭 위협이었다. 이들의 강력한 반대와 로비는 이미 이념적으로 JCPOA에 비판적이었던 트럼프 행정부에 합의를 파기할 완벽한 외교적 명분을 제공했다.  


VI. 붕괴 – 최대 압박과 새로운 저항 (2018년–현재)

미국의 탈퇴와 ‘최대 압박’

2018년 5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IAEA가 이란의 완전한 합의 준수를 거듭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JCPOA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했다. 미국은 즉각 자국의 제재를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이 이란과 거래하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강력한 ‘세컨더리 제재’를 동원한 ‘최대 압박(maximum pressure)’ 캠페인에 돌입했다. 이 정책의 목표는 이란 경제를 완전히 마비시켜, 이란의 미사일 프로그램과 역내 활동까지 포함하는 더 강력한 ‘새로운 합의’를 하도록 굴복시키는 것이었다.  

이란의 대응: ‘전략적 인내’에서 ‘계산된 확전’으로

미국의 탈퇴 직후, 이란은 EU3, 러시아, 중국 등 다른 서명국들이 합의의 경제적 이익을 보장해주기를 기대하며 ‘전략적 인내’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유럽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제재를 우회할 실질적인 방안이 마련되지 않자, 이란은 미국이 탈퇴한 지 정확히 1년 후인 2019년 5월부터 JCPOA가 규정한 핵 활동 제한을 단계적으로 위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단계적 조치는 매우 계산된 것이었다. 이는 국제사회에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한 책임을 묻고, 유럽의 더 적극적인 역할을 압박하며, 동시에 미국에 대한 협상 레버리지를 높이려는 다목적 포석이었다.

단계 (날짜) 이란의 조치 위반한 JCPOA 제한 조항 전략적 목적
1단계 (2019.5.8) 저농축 우라늄 및 중수 저장량 한도 초과 농축우라늄 300kg, 중수 130톤 저장 한도 합의 파기의 첫 신호탄, 유럽의 대응 촉구
2단계 (2019.7.7) 우라늄 농축도 상한선(3.67%) 초과, 4.5% 농축 시작 우라늄 농축도 3.67% 제한 브레이크아웃 타임 단축 시작, 기술적 압박 강화
3단계 (2019.9.6) 신형 원심분리기 연구개발(R&D) 착수 R&D용 원심분리기 종류 및 수량 제한 미래 핵 능력 고도화, 협상력 증대
4단계 (2019.11.5) 포르도 지하 농축 시설에서 우라늄 농축 재개 포르도 시설에서의 농축 활동 금지 가장 민감한 시설 재가동, 군사적 전용 우려 극대화
5단계 (2020.1.5) 원심분리기 수량 등 모든 운영상 제한 철폐 원심분리기 운영 수량(5,060기) 제한 JCPOA의 핵심 제한 무력화, 사실상 합의 탈퇴 선언

 

이후 이란은 우라늄 농축도를 60%까지 끌어올렸는데, 이는 평화적 목적의 민간용으로는 전혀 필요가 없는 수준이며 핵무기급인 90% 농축으로 가는 기술적 문턱을 거의 넘어선 것을 의미한다.  

그림자 전쟁과 새로운 현실

JCPOA의 붕괴는 더 위험한 시대를 열었다. 이스라엘은 이란의 나탄즈 핵시설과 핵심 과학자들을 겨냥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보타주와 암살 작전을 벌여왔다. 이란의 브레이크아웃 타임은 이제 수주, 심지어 수일 단위로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비록 핵탄두를 미사일에 탑재할 수 있도록 소형화하는 최종 기술(weaponization)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지만, 이미 핵폭탄 여러 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의 고농축 우라늄을 비축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JCPOA 복원을 위한 외교적 노력이 재개되었지만, 양측의 불신은 극에 달해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최대 압박’ 전략은 더 나은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토록 막으려 했던 최악의 결과를 초래했다. 즉, 아무런 제약 없이 빠르게 발전하는 이란 핵 프로그램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전략은 경제적 고통이 정치적 굴복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강압 이론에 기반했지만 , 이란에게 핵 프로그램은 경제적 이익을 넘어 국가 안보와 체제 생존의 문제였다. 따라서 이란은 굴복하는 대신, 경제적 고통을 감내하면서 핵 프로그램을 가속화하여 맞대응하는 길을 택했다. 그 결과 미국은 JCPOA 시절보다 핵무기에 훨씬 더 가까워진 이란을 마주하게 되었고, 이는 최대 압박 전략의 명백한 실패를 보여준다.  

 

더 심각한 문제는 JCPOA 붕괴 경험이 이란 지도부, 특히 현재 권력을 장악한 강경파에게 미국과의 어떤 외교적 합의도 신뢰할 수 없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는 점이다. 이란은 IAEA의 검증 하에 합의를 준수했지만, 미국은 일방적으로 탈퇴했다. 이는 서방을 믿었던 온건파의 정치적 자산을 완전히 파괴했고, 강경파의 회의론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따라서 향후 어떤 협상에서든 이란의 요구는 단순한 제재 해제를 넘어, 미국이 다시는 합의를 파기할 수 없다는 철통같은 보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미국 대통령도 헌법적으로 차기 행정부를 구속할 수 없기에 이는 워싱턴이 수용 불가능한 요구다. 결국 양측의 외교적 교착 상태는 단순한 정치적 이견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VII. 결론: 끝나지 않은 핵 집념과 임박한 위기

이란의 핵을 향한 70년의 여정은 그 동기가 결코 정체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팔라비 왕조 시대의 위신을 향한 열망에서 시작하여, 이슬람 혁명과 전쟁의 트라우마 속에서 탄생한 억제력에 대한 강박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국제사회의 압박에 맞서는 국가적 자부심과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오늘날 이란은 핵 문턱 국가(nuclear threshold state)로 서 있다. 한때 그들의 핵 시계를 성공적으로 멈춰 세웠던 유일한 장벽인 JCPOA는 폐허가 되었다. 국제사회는 이제 가혹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핵으로 무장한 이란을 용인하고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중동의 핵 도미노 현상을 감수하거나 , 이를 막기 위해 파국적인 지역 전쟁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페르시아 핵 프로그램의 70년 역사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 역사에 새겨진 깊은 상처, 그리고 안보와 정의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인식이 충돌할 때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경고적인 이야기다. 이제 핵에 대한 집념은 이란의 국가 정체성과 안보 독트린에 너무나 깊숙이 얽혀 있어, 이를 풀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참고자료

  • YouTube - 이란 이라크 전쟁 화학무기 트라우마 핵개발 동기 분석
  • YouTube - 이란 핵개발 러시아 중국 협력
  • 중앙일보 - 중동 핵 도미노 사우디 터키
  • 미국의 소리(VOA Korea) - 이란 핵협상과 한반도 비핵화 교훈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PUAC) - 이란 핵협상과 한반도 비핵화 교훈
  • 동아일보 - 이란 이라크 전쟁 핵개발 재개 동기
  • 국가안보전략연구원(INSS) - 이란 핵협상과 한반도 비핵화 교훈
  • YouTube - 이란 나탄즈 아라크 핵시설 폭로 2002년
  • 나무위키(Namu.wiki) - 이란의 핵개발
  • 나무위키(Namu.wiki) - 사우디아라비아-이란 관계
  • 국제금융센터(KCIF) - 이란 핵 리스크 국제 유가 영향
  • 연합뉴스 - 이란 나탄즈 핵시설 위성사진
  • 연합뉴스TV - 중동에도 핵 도미노 오나…사우디 "이란 핵 갖는다면 우리도"
  • 한국무역협회(KITA) - 중동 앞다퉈 트럼프 구애 사우디 '860조 투자'·이란 협상 희망
  • 연합뉴스 - 이란 사우디 패권 경쟁과 핵개발
  • 한국일보 - 수십년간 핵 개발한 이란…핵무기 보유 눈앞에서 좌절되나
  • 뉴스스페이스 - 이란 사우디 패권 경쟁과 핵개발
  • RAND Corporation - 이란 핵협상과 한반도 비핵화 교훈
  • 외교부 - 이란 핵개발 재개 동기 및 과정
  • 미국의 소리(VOA Korea) - 이란의 핵 개발 과정과 현황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PUAC) - 이란 핵협상(JCPOA)의 교훈과 시사점
  • 동아일보 - “이란이 하면 사우디도” 빈 살만 '핵무장' 발언에 중동 패권 경쟁 재주목
  • 비즈니스포스트 - 국제유가 하락, 이란의 핵 협상 재개 움직임에 지정학적 불안 완화
  • TRT Global - 이스라엘의 대규모 이란 공격에 대해 알아야 할 사항
  • YouTube - 이란 우라늄 농축 60% 이스라엘 공격
  • 국제지역정보연구원(RIIA) - 미국의 '이란 핵 합의(JCPOA)' 탈퇴 이후 미·이란 갈등 분석 및 전망
  • 브런치 - 이란 이라크 전쟁 핵개발 재개 동기
  •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 이란 핵개발 러시아 중국 협력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PUAC) - 다른 듯 닮은 이란과 북한의 핵 문제, 지역 위기 관리하는 협상 모델 필요
  • YTN - 이란 핵 기술 자립 국가 자부심
  • Daum News - 트럼프 '이란 위협'에 국제유가 4%대 급등…국내 기름값 영향
  •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KINAC) - 이란 핵합의 탈퇴 선언, 고조되는 국제 핵비확산 갈등과 전망
  • 나무위키(Namu.wiki) - 팔라비 왕조
  • 한겨레 - 이스라엘, 이란 핵시설 중수로 폭격
  • 중국국제방송(CRI) - 이란 핵개발 러시아 중국 협력
  • 한국경제 - 트럼프 '핵합의 파기' 후 재개 이란 핵시설 상당부분 온전
  •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IFANS) - 이란 핵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적 노력
  •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IFANS) - 사우디·이란 관계 정상화 합의의 함의와 전망
  •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IFANS) - 바이든 정부 이란 핵합의 복귀 전망
  • 조선일보 - 트럼프 JCPOA 탈퇴 이란 대응
  • 대외경제정책연구원(EMERiCs) - 이란의 신정권과 미래 향방
  • 한겨레 - 국제유가 2% 급등 이스라엘, 이란 핵시설 타격 우려 영향
  • 조선일보 - 이스라엘, 정작 60% 고농축 우라늄 최대 저장시설은 공격 안한 이유는
  • 연합뉴스 - 이란 이슬람 혁명 핵 프로그램 중단
  •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 - 이란 핵 프로그램 구축배경 및 협상경과
  • 중앙일보 미주법인 - 이란 이슬람 혁명 핵 프로그램 중단
  • 위키백과(Wikipedia) - 포괄적 공동행동계획
  • 아산정책연구원 - 위기의 이란 핵
  • 미국의 소리(VOA Korea) - 바이든 외교안보팀과 이란 핵합의
  •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KINAC) - JCPOA 복원 협상 재개
  • 외교부 - 최종건 제1차관, 이란 핵협상 관련 당사국 대표 면담
  • 조선일보 - 이란 핵합의(JCPOA)란?
  • 외교부 - 이란 핵문제
  • 국악타임즈 - 최종건 제1차관, 이란 핵협상 관련 당사국 대표 면담
  • 위키백과(Wikipedia) - 팔라비 제국
  •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IFANS) - 이란의 비밀 핵개발 폭로
  • 위키백과(Wikipedia) - 이란의 핵시설
  • 정책브리핑(Korea.kr) - 최종건 제1차관, 미국 이란특사 및 EU 대표와 이란 핵협상 관련 협의
  • 통일연구원(KINU) - 북한 핵문제와 예방외교

 

태그

#이란핵 #JCPOA #이란역사 #중동정세 #핵비확산 #미국이란관계 #팔라비왕조 #이란이슬람혁명 #이란이라크전쟁

728x90